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아프리카 전역 (문단 편집) == 롬멜의 분전 == 영국 본토에서 전차와 물자를 보급받은 웨이벌 장군은 브레비티 작전을 수립하고 5월 15일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초기 3일간 영국군은 할파야 고개와 카푸초 요새 인근까지 진군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롬멜이 이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공세는 좌절됐고 새로 투입된 전차들은 셔먼도 한방에 보내버리던 [[88mm 대공포]](대공뿐만 아니라 대전차, 야포도 되는 사실상의 만능포)에게 [[관광]]탔다. 그리고 롬멜이 역반격을 가하자 결국 패주하여 5월 27일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6월 14일 훨씬 규모를 확대시킨 [[배틀액스 작전]]을 수립하고 다시 한 번 리비아 땅에 들어가 역시 카푸초 요새와 할파야 고개까지 넘봤으나 이번에도 롬멜의 기민한 대처에 그대로 역관광당하고 다시 이집트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마틸다 II|마틸다]], [[크루세이더 전차|크루세이더]], [[밸런타인 전차|발렌타인]] 등의 전차를 대규모로 투입하였으나 그 망할 놈의 88mm가… 실제 할파야 고개 전투에서 1개 대전차포병 대대에게 영국군 전차부대가 완전히 [[개발살]]나면서 88mm의 명성만 드높여줬다.[* 당시 영국군 전차들은 대전차용 철갑탄만 있을뿐 이런 대전차포같은 걸 잡을 수 있는 고폭탄이 없어서 더욱 일방적으로 털려나갔다.] 결국 롬멜의 명성 역시 높아져갔고 영국군 사령관 웨이벌 장군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해임당하고 [[클로드 오킨렉]] 대장이 신임 사령관으로 발령되었다. 한편 배틀액스 작전이 끝난 직후 영국군은 공군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공군 전력을 2배로 증강하기로 하고 서부사막공군을 창설하였다. 다만 아직 영국 본토 사정이 좋지 않아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는 보급받지 못했고 [[호커 허리케인]]과 미국에서 수입한 [[P-40 워호크|토마호크와 키티호크]] 위주로 병력을 편성하였다. 한편 독일군은 [[Bf109]]를 가지고 온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전투력 면에서 열세였지만 독일군의 물량이 적다는 점을 노려 서부사막공군은 순전히 '''물량으로''' 승부를 걸었다. ~~다구리 앞에는 장사 없습니다~~ 롬멜이 공군 책임자에게 '''"왜 하늘에는 영국 전투기만 보여? --일 똑바로 못해?!--"'''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 시점도 이 때부터이다. 이 무렵 영국은 이집트의 상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점이었는데 때마침 히틀러의 최고의 무리수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영국에게 행운으로 작용하였다. 애초에 히틀러가 노리고 있던 제1의 목표는 [[소련]]이었고, 그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북아프리카 전선의 병력 및 물자 보급 우선순위가 뒤로 쳐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전선의 특성상 '''소련 침공보다 더 긴 거리를 영국 해군과 공군이 장악한 지중해를[* 물론 지중해에 전개된 해상 및 항공전력 자체는 독일+이탈리아군의 우위였다. 심지어 영국은 항공모함과 전함들이 줄줄이 격침/대파되어 모조리 전열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바람에 전함도 항공모함도 없는 상황이 된 적이 있었고 그나마 지중해 함대가 보유한 전함들은 전부 1차 대전 이전에 건조된 구형함정들이었다. 반면에 이탈리아는 신형 전함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기에 루프트바페와 유보트가 가세한 상황이었으니 지중해 함대가 총 전력에서 열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오히려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피해다니기도 했다.] 건너 단 1개의 해안도로로 운송해야 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물자를 더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사실 히틀러는 동부전선에 14,000대 밖에 없는 트럭을 북아프리카 전선에 8,000대나 주는 등 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는 물자를 주려고 노력했다. 롬멜 역시 자신의 탁월한 전술적 능력으로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이길 수는 있었지만 언제나 충분하지 못한 병력과 물자를 걱정하며 싸우는 실정이었는데 독소전의 시작은 큰 부담이 되었다.[* 애초에 소련 침공이 우선이라 롬멜을 보낼 때 소련 침공이 가장 중요하니 북아프리카에서 판 크게 벌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롬멜은 이탈리아군과 나치 독일군의 사기가 나락이였으며 동맹국 이탈리아의 구원요구 때문에 무시하고 공세전환으로 판을 키웠다. 롬멜이 도착하자마자 공세를 시작해 허세로 영국군을 밀어낼 때 독일 본국에서 분노한건 공세가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딸랑 2개 사단도 다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발대의 미약한 전력으로 시작한 공세라서 만약 영국군이 제대로 반격하면 그대로 분쇄되고 트리폴리까지 영국군이 진격하면 그대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그리고 토브룩까지 밀어낸 시점에서 토브룩에 맹공을 퍼부어 피해를 늘리자 더욱 분노했다. 애초에 롬멜을 보내기 전에 현장답사를 한 독일 장교들은 트리폴리와 토브룩을 오가는 기동방어를 예상했고 그 예상대로 롬멜은 몇번이나 수백킬로미터를 왕복해야 했다.] 결국 롬멜은 토브룩 점령을 시점으로 더 이상의 공세는 펼치지 않기로 하고 수비태세로 전환하였다. '''원래 이탈리아 영토라는 점을 감안하면 겨우 원상복귀로 돌려놓은 것이다.''' 영국 역시 롬멜을 확실하게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 영국군은 또다시 대병력을 동원하여 크루세이더 작전을 실행하였다. 이 전투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12월까지 계속되었는데 롬멜이 대체적으로 전력면에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용병술을 발휘하여 공세를 취하는 영국군 제8군을 매번 격퇴시키면서 오히려 이집트 지역 국경선까지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수적 우위를 이용한 공격에 물자가 부족한 롬멜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가잘라 방어선과 아게다비아를 포기하고 엘 아게일라까지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1942년]] 1월, [[몰타항공전|몰타가 말라죽어가면서]] 영국군의 방해가 없어진데다가 전선이 후방으로 후퇴하면서 '''운송거리가 극적으로 줄어들어''' 잠시 보급이 원할하게 진행이 되자 롬멜은 도박을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더 이상 전투를 끌어봤자 독일-이탈리아군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다시 한 번 공세를 펼쳐서 영국군을 리비아에서 몰아내기로 하고 작전을 수립하였다. 부하나 참모는 물론 당사자인 이탈리아군도 모두 이 작전이 무리수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철회를 요청하였으나 롬멜은 고집을 부려 작전을 추진하였다. 롬멜의 기습적인 공세는 영국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또 다시 전군이 붕괴되어 후퇴를 시작하였다. 1월에 아게다비아와 [[벵가지]]를 탈환하였고, 2월에는 가잘라 방어선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여기서 영국군이 세운 방어선 때문에 한동안 고전했다. 그러나 5월에 가잘라 방어선을 돌파하였으며, 돌파한 병력이 역포위당하는 상황에서도 분전해서 영국군의 주력을 일시적으로 소멸시키는 바람에 6월에는 눈에 가시나 다름없었던 --원래 이탈리아 점령지였던-- 토브룩을 탈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비록 독일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롬멜이 지휘하던 부대의 13%에 해당하는 3,040명의 병사들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심각한 것은 300여명의 장교들을 잃었는데 이는 전체 장교수의 7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중요한 보급선과 더불어 막대한 포로들[* 영국군 1만 9,000여명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백인 9,000여명 및 9,000여명 정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원주민과 인도인 병사 등.]과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미처 파괴시키지 못했던 영국군의 보급물자들[* 식량 5,000t과 연료 2,000t과 2,000여대의 차량 등.][* 추가로 독일의 승전보고서에는 45,000명의 포로와 장갑차량 1,000여대 및 화포 400여문을 획득했다고 하였다. 물론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음을 알 수 있다.]을 대량으로 획득하게 됨으로써 군세를 다시 강화하였고 그 기세를 몰아 롬멜의 최대 실수이자 도박인 리비아-이집트 국경을 넘어 이집트 영내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오킨렉 대장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엘 알라메인에서 완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무렵 몰타가 다시 살아난데다가 '''북아프리카 전선 사상 최장의 보급거리'''로 인해 운송되는 물자의 태반이 2,000km나 떨어진 트리폴리에서 정체되는 등 독일-이탈리아군의 끊어지기 일보 직전의 보급선을 영국군이 추가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하면서 연료와 탄약을 걱정하며 싸우는 지경이 되자 롬멜은 공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위에 언급한 벵가지나 토브룩의 항만을 이용하면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선 몰타의 영국 해군과 공군 때문에 보급선 자체가 달랑달랑한 상태라서 큰 의미가 없었다. 이 무렵 [[윈스턴 처칠]]은 "그놈의 롬멜! 우리 영국군은 그 놈 하나 못때려잡고 뭐하는 거야!?"라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는데 [[버나드 몽고메리|우연한 인사]]가 대박이 될 줄은 처칠조차도 몰랐으니…[* 처칠은 몽고메리 인사에 기대는 커녕 몽고메리의 등판소식에 한탄과 한숨일 정도로 낙담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며 몽고메리가 질로 안되면 물량으로 승부하자는 작전으로 방어공세만 하자 처칠은 전임장군과 같이 패배주의자라며 더욱더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서 승리하며 북아프리카 전선을 이기게되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게다가 영국군 역시 '''그놈의 롬멜의 지휘차량 '''[[맘모스]]'''를 반드시 전리품으로 취하고 말겠다'''며 지휘차량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다. 맘모스가 노획한 영국제 도체스터 트럭에 지휘통신 시설을 갖추는 개조를 한 차량이라 그 상징성이 컸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